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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6월호] [굿바이 마이 그라운드] 무명선수, 명장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2018.06.21 Hit :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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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언젠가 이름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빠가 될 것이며 직업과 직함은 먼지 묻은 추억 속 사진으로 존재를 대신한다.


한 길만 파온 우물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내 인생을 걸었던 몰입이 꼴도 보기도 싫어진다면. 20년을 축구만 바라봤던 박희완 감독. 그저 내가 좋아하는 축구만 바라보니 따라왔던 축구선수라는 칭호.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진 또 하나의 이름, 박희완이자 축구선수. 이제 인생에 축구는 없을 거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했던 말 ’다시는’. 다시 10년 동안 아빠, 남편, 선생님, 감독님이 되기까지. 잃어버린 직업 속 천직을 되찾은 그가 외치는 말. “굿마이 마이 그라운드”


“운이 좋다. 선수뿐만 아니라 선수 출신들도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게 요즘이다. 대한민국 취업난은 축구도 마찬가지다. 우승도 못 한 감독이다. 유명하지 않은 선수였음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축구를 향한 사랑이다. 나는 축구가 너무 좋다.”


축구선수 박희완은 무명선수에 가깝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동료들은 “공 잘 차는 선수”로 기억한다. 한양공고,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9년 드래프트 6순위로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출전 기회가 없자 군 입대를 택했다.


이후 울산현대미포조선에 자리를 잡았다. 내셔널리그의 전설적인 선수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다. 그가 뛰던 시대상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위상이 철저히 다르다. 이름도 K2리그, 지금의 K리그 2와 승강제는 없었다. 인천유나이티드가 탄생할 시기였고 아직 전북 현대가 아시아챔피언스리그도 우승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말이 아마추어지 경험 많은 선수들이 대거 활약한 곳이었다. 2005년에는 FA컵에서 대활약하며 팀이 준우승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K리그 신생구단 대구FC로 향했으나 2007년 K리그 2 수원FC 전신 수원시청축구단으로 내셔널리그에 복귀했다.


짧다면 짧은 10년 축구선수 인생, 그렇게 그의 칭호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얻은 또 하나의 이름 ‘감독’ 역시 10년 가까이가 필요했다.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박희완 감독은 부임 9년 만에 우승에 성공했다. 올해 초 2월 10일 제 39회 대한축구협회장배에서 우승하며 첫 헹가래를 받았다. 한 우물 전문 박희완은 포기하지 않았다. 축구선수 10년, 지도자 10년. 이제야 자신의 그라운드에게 뜨겁게 안녕을 고했다.


“은퇴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른 선배들처럼 훌륭한 선수가 아니다. 그래서 은퇴하는 기분도 안 들었다. 2009년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에서 시즌 도중 축구를 그만뒀다. ‘다시는 축구장에 돌아오지 않겠다’라며 떠났다. 그런데 또 10년 동안 이렇게 축구장이 내 집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당시 박희완 감독은 여전한 기량에도 축구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구단과 마찰이 있었고 그리도 좋아하던 축구가 싫어졌다. 20년 가까이 축구만 바라본 그는 쉬고 싶었다. ‘쉬고 올게’라는 쪽지만을 남긴 채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에서 그는 다시 축구바람이 들어 선생님이라는 이름과 함께 잔디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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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는 백록기 대회가 열리는 한마디로 축구판이었다. 우연히 옛 동료와 함께 다시 시작한 축구가 지도자가 되는 길이 됐다. 그때만 해도 여전히 축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당시 천안농고, 지금의 천안제일고 코치가 공석이라는 말과 함께 제안이 왔다. ‘팀이 많이 망가졌다.’라는 말로 제안을 받았는데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충남, 천안 모두가 나를 반대했다.”


“자신은 있었다. 감독도 아니고 코치니 또 선수 경력도 많으니 했던 걸 그대로 하면 되겠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존 감독님이 물러나게 됐다. 그래서 덜컥 감독이 됐다. 처음에는 나도 나가려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지도자를 하는 건 모두에게 잘못이라 생각했다. 당시 지역에서도 반대하셨기에 미련 없이 나가려 했다.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이 나를 믿어주셨다. 코치로 3개월 동안 지낸 모습을 좋게 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박희완의 은인이다.”


소주 마시러 갔던 제주에서 다시 축구를 찾았다. 축구가 싫어졌다던 그의 말은 아마도 지금의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도피였을 지도 모른다.


부임 당시 천안제일고는 오기 ‘싫은’ 팀이었다. 선수 수급마저 쉽지 않았다. 맘에 드는 선수가 있어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때 박희완 감독에게 꿈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축구가 맞다. 선수 시절 ‘나는 다시 태어나도 축구선수를 하겠습니다.’라고 당시 미니홈피에 적었다. 지금도 다시 태어난다면 꼭 축구선수 하고 싶다고 꿈을 꾼다. 축구가 너무 좋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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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으로 바뀌고 내 꿈도 달라졌다. ‘나의 꿈은 제자들의 꿈이 되었다.’ 내가 축구선수로 뛸 때 꾸던 꿈이 지금 내 제자들이 꾸는 꿈이다. 우리 제자들이 잘되는 게 내 꿈이다.“


”우리가 운동할 때는 4개 대회를 뛸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대회라도 잘하면 좋은 대학을 갔다. 지금은 2개를 나가니 오히려 성적만 더 중요해져 성과 지상주의가 됐다. 좋은 선수로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보다 결승전이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게 정말 중요한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내 꿈이 됐다. 나 하나만을 보고 살았다면 이제는 어깨가 무겁다. 예전에는 선수가 없어 팀을 꾸릴 수가 없었다. 9년 동안 우리 아이들이 너무 잘해줬다. 그래서 지금은 하루에도 몇 건이고 우리 팀에 올 수 없냐는 전화가 온다.“


10년 전 은퇴했다. 짧아 보이나 1부, 2부리그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오래 시간이 흘렀다. 매년 팀에서 핵심으로 뛰었던 선수는 선수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신세가 됐다. 다시 돌아온 그라운드는 그다지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굉장히 젊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한국 축구는 자신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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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1부리그 2부리그 개념도 없었다. 내셔널리그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모든 실업 축구가 프로화가 되길 바랐다. 장차 우리 아이들이 뛰려면 판이 커지는 방법 말고는 없다. 물론 지금 수원시청은 수원FC가 됐다. 하지만 울산현대미포조선은 해체됐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당시 FA컵 준우승 때만 해도 미포조선이라는 팀은 지금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평균 연령이 높았고 축구 시스템도 한참 부족했다. 솔직하게 나는 축구를 잘하는 편이었다. 요즘은 당장 우리 팀만 해도 내 어릴 적보다 못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다른 팀도 마찬가지다. 선수들 수준이 아주 높다. 그런데도 너무 기대치와 눈이 높아 괜히 부담만 준다.“


“그래가지고는 좋은 결과를 내기가 어렵다. 지금처럼 힘이 좋다기보다 공을 잘 차는 선수들이 많았다. 타고난 감각이 좋은 선수가 되는 시대였다. 지금은 내가 봐도 아이들 너무 잘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왜 저기서 하프발리슛을 못 하냐’ 이러는데 무슨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도 아니고 솔직히 우리보다 잘하는데 선수로 뛰기엔 우리보다 환경이 안 좋아 안타깝다. 더 뛸 수 있는 곳이 많아지길 바란다.”


축구선수를 마친 박희완 감독 역시 선수 시절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 호텔, 장어, 백숙, 소고기 등 선수 때는 흔히 접하던 것들이 이제는 귀하게 됐다.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지금의 소중함 잃지 않았으면”

‘간절함이 보이지 않는다.’ 관계자뿐만 아니라 팬들도 최근 자주 언급하는 부분이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안다.


“대학교에서 축구를 그만둔 친구들은 운동과 먼 삶을 사는 편이다. 운동만 했던 친구들보다는 훨씬 적응을 잘한 것 같다. 대다수는 축구가 싫어서 관두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한계를 느낀다.”


“‘축구를 그만두면 할 게 없다’에 반문하는 사람이다. 축구는 단체스포츠. 내가 살아온 모든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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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밖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려나 동료의 도움을 받는 법을 깨닫는다. 하는 데까지 해봤는데 능력이 안 돼서 그만두는 건 좋게 본다. 오히려 뭘 해도 잘할 사람들이다. 포기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간절했으면 좋겠다. 우리 때는 아저씨들이 설렁설렁 대충 사는 것 같아도 경기와 훈련 시간에는 이보다 열심히 하는 선수들을 본 적이 없다. 호텔? 은퇴하고 가본 적이 없다. 장어는 생일 때나 가능하다.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뭘 해도 안 될 것이다. 지금의 소중함 잃지 않길 바라는 게 선배의 부탁이자 당부다.”


대한민국 명장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국가대표” “유명” 최소 하나라도 갖춰야 한다.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처럼 느껴진다. 비선출 감독, 비선출 해설 등 최근 선수 출신이 아닌 일반인들의 벽을 깨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당장 유명했더 선수도 감독 지휘봉을 잡는 게 쉽지 않다.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프로 무대에서도 유명세를 감독 선정에 우선순위를 둬 최근 여러 차례 홍역을 앓기도 했다. 박희완 감독은 아주 특이한 사례다. 서른 중반 은퇴 후 고교팀 감독을 맡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9년의 밤잠을 설쳤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수 수급도 어려웠던 초짜 감독에서 보내고 싶은 팀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국가대표가 아니라고, 유명한 선수가 아니라고 해서 좋은 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법 없다. 나는 늘 기적이라 생각한다. 나와 같이 축구했던 선수들 중에는 지금도 코치를 하는 분들이 많다. 9년 전 지휘봉을 잡았을 때도 어렸지만 지금도 어린 편이다. 국가대표 한 번 안 해본 감독도 유일하다.”


“유명한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될 조건은 많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내가 잘되면 후배들이 나처럼 기회를 받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한다. 어느 팀이나 감독의 능력만으로 선임할 수는 없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 유럽의 나겔스만이나 무리뉴 감독처럼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더라도 훌륭한 감독이 된 사람처럼.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선수에서 감독까지 된 펩 과르디올라처럼 가보고 싶다.”


“천안제일고를 넘어 천안 성인팀 천안시청축구단 감독도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한다. 더 올라가서 충남 프로팀, 대한민국 대표팀까지 나는 꿈이 많다. 즐겁다. 내가 선수로 뛰었던 리그에서 감독이 된다면 재밌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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