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종덕, '70년대 한국축구를 화려하게 수놓은 중거리 슛의 명수'①

관리자 2007.04.09 Hit : 8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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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7회 및 6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한국 대표팀의 거침없는 행보가 시작되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 최종예선 첫 경기인 쿠웨이트 전에서의 승리로 인해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본격적인 월드컵 열기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다.

5회 연속 월드컵 진출과 꿈만 같았던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룬 지금이야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팬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의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20년 전 잠실벌에서 허정무의 결승골로 일본을 누르고 86 멕시코 월드컵 진출을 결정짓기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은 잡을만하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월드컵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70년대 한국 축구는 그 어떤 시기보다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때문에 경기장은 언제나 활력이 넘쳤고, 고등학교 팀들 간의 경기일지라도 경기장은 만원을 기록할 정도로 팬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 한국축구 중흥기의 한 가운데에 '중거리 슛의 명수' 최종덕이 있었다. 당시 풀백으로선 상당히 큰 177cm의 신장에서 빚어진 당당한 체구와 한국인답지 않은 긴 하체, 한껏 멋을 낸 장발이 매력적이었던 이 미남스타는 70년대 한국 축구의 명승부마다 자신의 전매특허인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상대 골문을 열어젖히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다.

최종덕 감도은 화려한 선수생활 이후에는 축구 전도사를 자처하며 유소년 축구와 학원 축구 발전에 공헌했고, 현재는 K2리그 최초의 시민구단인 서산 시민축구단의 감독으로서 활약 중이다. 이제는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지만 축구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철학과 의지를 밝힐 때만큼은 슈퍼스타의 힘과 품위가 느껴졌다.

지금도 한국축구에는 많은 스타들이 탄생되고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갈수록 오늘날의 한국축구를 존재케 한 과거의 명선수들은 올드 팬들의 전유물로만 남겨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비록 월드컵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축구의 가장 찬란한 도전 중 하나로 남은 그 시절의 축구를 젊은 팬들과 공유하고, 오랜 팬들은 그 추억을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70년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중 한명인 최종덕 감독과의 인터뷰를 기획하게 됐다.

다음은 최종덕 감독과의 인터뷰.


- 70년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다. 다소 식상한 질문이겠지만,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나?

나의 고향인 충남 서산의 해미라는 지역이 면 단위인데도 축구가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는 고장이었다. 그래서 과거부터 많은 축구선수들이 배출됐었고, 그런 영향으로 자연스레 축구에 빠져들었다. 해미 중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대구에서 벌어진 학도 체육대회에 서산 대표로 출전했었다. 그 대회에서 우리 팀이 3위에 입상했는데, 경기를 관전하러 오셨던 서울 중앙중학교의 축구부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축구를 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제의하셨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스카웃이었던 셈이다.

- 예전의 기사 자료들을 찾아보면 축구를 하기 위해 집을 나가셨다고 되어 있던데?

(웃음) 원래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내가 운동보다는 공부를 하길 바라셨고, 축구를 시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셨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다. 결국은 집을 나왔고, 서울에 올라와서 중앙중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 과거 중앙 중?고에는 축구부가 없었던 걸로 안다.

원래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일제 시대 때 활동이 중단됐었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가기 5년 전에 선배들이 축구 붐을 일으키며 팀이 다시 운영되기 시작했다. 내가 뛰던 당시에는 각종 축구대회 결승에서 대신고와 자웅을 겨뤘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었다.

- 70년대에는 조영증, 박성화 등 어느 때보다 많은 명수비수가 배출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했던 수비수는 단연 최종덕이라 할 수 있다. 학창 시절부터 수비수로 활약하셨던 건가?

학창 시절에는 미드필더를 맡기도 했다. 패스 능력이 좋았기 때문에 감독님께서 중앙에서 링커 역할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센터백과 풀백에 섰던 걸로 기억한다.


 


- 73년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멤버로 발탁되시며 팬들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셨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연습 경기에서 A대표팀을 누를 정도로 강한 전력을 자랑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주로 벤치 멤버로 있었는데 주전 선수들의 면면이 뛰어났다. 포워드 라인에는 허정무와 박종원, 미드필더에는 이영무, 박병철이 있었다. 지금은 팬들에게 잊혀졌지만 송병덕, 윤종범도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이듬해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는 주전으로 출전했었다. 당시에는 청소년 선수권이 1년마다 열렸는데 그 대회에서 두각을 내면 자연스럽게 성인 대표팀에도 뽑혔다. 일종의 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다.

- 고려대 74학번(법학과)이신데, 대학 축구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와 연세대의 74학번들은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선수 구성을 자랑했다. 고대에는 박성화, 홍성호 등의 뛰어난 수비수들이, 연대에는 허정무, 조광래, 박종원 등 공격 쪽에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이 몰렸다. 당시 두 학교 정기전을 회상해주신다면?

축구는 정기전의 맨 마지막에 치러지는 정기전의 꽃이었다. 그 경기에서 지면 모든 경기가 진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느 종목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최우선적으로 무장하고 나갔었다. 내 동기들과 입학하면서 고대가 봄부터 내리 3번을 졌다. 다음에는 내리 3번을 이기며 복수를 했고, 이후에 내가 졸업할 때까지는 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열기가 대단하지만 당시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순히 양 학교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닌 전 축구팬의 관심사였다.

- 차범근 현 수원 감독이 79년에 독일로 진출할 당시 양 학교의 OB들이 총출동해 환송경기를 가졌는데?

79년 6월에 차범근 감독이 공군 현역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일로 진출하게 됐다. 대표팀을 비롯한 여러 경기에서 많은 활약을 했기 때문에 양학교의 선후배들이 차범근 감독을 위한 경기를 갖자고 의기투합했다. 축구협회에서도 많은 지원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축구협회의 김태화 부장님은 외국까지 나오셔서 그 경기를 성사시키셨다.

- 당시 대표팀 1군이라 할 수 있는 화랑 팀에는 언제 발탁되신 건지?

74년 말, 그러니까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그 이후로는 계속 화랑에 있었고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2군 격이라 할 수 있는 충무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 많은 팬들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라이트 윙에 섰던 차범근 감독과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우선 대학과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던 게 가장 큰 이유일 테다. 잘 알다시피 차범근 감독은 발이 빨랐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빈 공간에 치고 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정확한 킥이 장점이었기 때문에 움직여 들어가는 차범근 감독의 앞에다 떨어트려주는 패스를 넣어주었다. 그런 식의 공격이 당시 대표팀의 주요 공격루트였다.

또 많은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명승부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 전에서도 차범근 감독과 좋은 호흡을 보여줬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다. 당시 경기를 앞두고 최정민 감독님을 비롯한 코치 선생님들과 동료 선수들끼리 많은 얘기를 나눴다. 차범근 감독과도 내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면 어떻게 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다 보니 호흡이 좋았던 것 같다.

- 사실 그 무렵에는 수비수들에게 오버래핑이라는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선 드물게 공격에 가담하는 수비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당시에는 수비수가 공격 가담을 한다는 생각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측면을 돌아 들어가 어시스트를 하고, 골을 기록하고 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겼고, 대표팀의 수비전술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 감독님이 활약하던 비슷한 시기에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SV의 오른쪽 풀백인 만프레도 칼츠 역시 오버래핑을 많이 시도했었다. 개인기보다는 스피드와 킥으로 굵직하게 들어가는 플레이에서 두 사람이 비슷한 인상이었다.

당시 서독의 클럽들과 친선 경기를 많이 가졌고, 당시 TV에서 해주던 분데스리가 방송도 보면서 영향을 받았었다. 언제나 고민했던 것이 어떻게 하면 선진 축구의 플레이를 내게 맞게 활용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들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 최종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역시 77년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대 이스라엘 전에서의 중거리 슛 골이다. 당시의 중거리 슛은 올드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짧게 회상해주신다면?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대회 출전을 앞두고 항상 이스라엘에게 막혀 좌절했던 것이 70년대의 한국축구였다. 사실 텔아비브에서 먼저 벌어졌던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김진국 선배의 득점이 인정되지 않으면서 0-0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당시 오완건 단장님께서 격렬히 항의도 해봤지만 판정이 번복되지 않았다.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이번 홈 경기에서는 꼭 이스라엘을 잡고 월드컵에 진출하자는 의지가 강했다. 또 당시 선수들의 구성 면면을 볼 때 기량이나 컨디션 면에서 최정상이었다. 내가 마지막 골을 넣기는 했지만 다른 선수들의 지원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프라인 조금 넘은 거리에서 차범근 감독이 나에게 밀어준 공을 한번 툭 치고 나가 오른발 아웃 프론트로 감아 찼다. 발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거리가 40미터 가까웠는데 반대편 골 모서리에 그대로 꽂혔었다.

- 비단 그 골뿐만 아니라 많은 경기에서 중거리 슛으로 득점을 기록해 '중거리 슛의 명수'란 별명이 붙으셨는데? 원래 학창 시절부터 킥이 강하셨나?

원래 학창 시절에는 몸이 작고 힘이 약해서 킥이 잘 안됐었다.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킥력을 키우기 위한 연습을 했었다. 그 중 하나가 공을 물에 불려서 무겁게 한 상태로 때리는 방법이었다. 또 골대 모서리 양쪽에 깡통을 달아놓고 슛을 연습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맞추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어두워져도 연습할 수 있었다. 결국은 연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예전에 백승철 선수 인터뷰를 보면 슈팅을 끊어 차는 게 강한 슈팅을 차는 자신의 요령이라 밝혔었다. 슈팅을 강하게 찰 수 있었던 자신만의 특별한 요령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다.

물론 자신만의 주특기가 있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반복된 훈련을 통해 감각을 확실하게 익혔다. 이렇게 찰 때와 저렇게 찰 때,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차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정확하게 간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시합에서 그런 감각이 정확하게 느껴지면 여지없이 골이었다.

- 최종덕 이후에도 많은 캐논 슈터가 있었다. 황보관, 이기형, 백승철, 최근에는 대표팀의 막내인 김진규까지. 현역시절과 비교해 볼 때 누가 자신에 가장 버금가는 선수라고 생각하시나?

(웃음) 지금과 당시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힘들다. 열거된 선수들 모두 뛰어난 선수들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한국축구를 보면 여러 공격 옵션 중 강력한 중거리 슛이나 프리킥이 부족했는데 더 많은 선수들이 그런 부분을 염두하고 슈팅을 갈고 닦았으면 한다.

- 최근 대표팀 경기를 보면 김진규 선수가 먼 거리에서 과감한 프리킥을 많이 시도한다. 김진규의 슈팅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아주 좋은 선수다. 어린데도 자신이 차려고 하는 욕심도 좋다. 그런 슈팅을 할 수 있는 횟수가 잦아야 한다. 그런 기회를 자주 접하고 골을 많이 넣어보면서 더 정확하고 위협적인 슛을 찰 수 있는 선수가 될 것이다.

-> 2편에 계속...

스포탈코리아

(끝) < 저 작 권 자 내셔널리그 무 단 전 재 - 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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